Losungen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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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ärz 2015 (Römer 7,7-13)

Martin 님께서 2015-03-01 21:41, 2362 hits

Das Gesetz macht das Wesen der Sünde offenbar

7 Was wollen wir nun sagen? Ist das Gesetz Sünde? Das sei ferne! Aber die Sünde hätte ich nicht erkannt, außer durch das Gesetz; denn von der Lust hätte ich nichts gewußt, wenn das Gesetz nicht gesagt hätte: Laß dich nicht gelüsten!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Da nahm aber die Sünde einen Anlaß und bewirkte durch das Verbot in mir allerlei Gelüste; denn ohne das Gesetz ist die Sünde tot.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Ich aber lebte, als ich noch ohne Gesetz war; als aber das Gesetz kam, lebte die Sünde auf;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ich aber starb, und das zum Leben gegebene Gesetz erwies sich mir todbringend.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11 Denn die Sünde nahm einen Anlaß und verführte mich durch das Gebot und tötete mich durch dasselbe.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So ist nun das Gesetz heilig, und das Gebot ist heilig, gerecht und gut!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Gereichte nun das Gute mir zum Tode? Das sei ferne! Sondern die Sünde, damit sie als Sünde erscheine, hat mir durch das Gute den Tod bewirkt, auf daß die Sünde überaus sündig würde durch das Gebot.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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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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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에 대한 신학적 해설 (그말씀, 2000년 6월호) by 조병수목사

1. 로마서 7장의 여러 가지 개념 정리

로마서 7장에는 몇 가지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은 법, 나 (ego), 죄, 육신, 사망과 같은 단어들이다. 로마서 7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어들의 개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특히 문제가 되는 두 가지 단어인 “법”과 “나”에 관하여 살펴본다.

1) 법 (nomos)
로마서 7장에는 법이라는 단어가 모두 23번 나온다. 그런데 법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서 첫째로 구약의 율법을 포함하는 일반법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롬 7:1-6에는 혼인과 관련된 법이 언급된다. 그것은 기혼녀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이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남편에게서 자유하게 된다는 법이다. 롬 7:21에서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어 어떤 법칙 (원칙)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법칙이다. 이외에 로마서 7장에서 법이라는 단어는 주로 율법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그런데 이때 율법은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율법의 성격을 선명하게 지적한다. 율법은 거룩하다 (12절), 율법은 신령하다 (14), 율법은 선하다 (16). 물론 로마서 7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또 다른 차원의 법이 소개된다. 그것은 율법과 “다른 법” (23) 곧 “죄의 법” (23,25)이다.

2) 나 (ego)
둘째로 로마서 7:7-25에서 8번 사용되는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많은 논쟁이 있다. 이 단락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시제의 변환이다. 롬 7:7-13에서는 과거시제가 사용되고, 롬 7:14-25에서는 현재시제가 사용된다. 이것은 “나”의 정체와 관련한 논쟁을 일으키는 주요원인이 된다. “나”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해결책으로 크게 두 가지 제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제안은 “나”를 바울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자전적인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또 다시 두 가지 견해로 갈라진다. 한 견해에 의하면 “나”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자기 모습을 묘사하는 자전적인 기술이라는 것이다 (Dodd). 다른 견해는 “나”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는 자전적인 기술로 생각한다 (Nygren).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도 바울에게 선과 악, 의와 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학적인 내적 싸움이 있다는 것이다 (MacGorman).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여전히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으로 여겨진다 (Vorlaender). 그러나 이에 대하여 둘째 제안은 다른 해결책을 추구한다. 이 단락에서 사용된 “나”는 사도 바울의 역사적-신학적인 인간이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Kertelge). 다시 말해서 이 단락이 설명대상으로 삼는 것은 단지 사도 바울이라는 한 인간이 아니라, 전형적이며 본질적인 의미에서 죄아래 있는 인간 전체이라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구속받은 자의 의식으로부터 비그리스도인의 싸움과 구속열망을 묘사하고 있다” (Kuemmel, 118). Kuemmel은 이 단락을 바울의 자전적인 고백이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체험을 다루는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들을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Kuemmel은 사도 바울이 이 단락에서 “나”라는 문체를 사용하여 “율법은 반드시 죄의 손잡이가 되고 말기 때문에 단지 죽음으로 이끌어 갈 뿐”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Schnackenburg).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한 일인칭 용례를 잘 살펴보면 Kuemmel에 대하여 반론이 생긴다. 비록 사도 바울은 이미 앞에서 “나” (ego)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일인칭 어미를 사용하여 바울 자신이 화제가 됨을 알려주고 있다 (롬 6:19; 롬 7:1/; 참조. 롬 10:19; 16:4). 게다가 바울은 후에도 여러 번 “나” (ego)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을 서술한다 (롬 11:1; 롬 11:13; 참조. 롬 9:3). 따라서 이 단락에서도 일인칭 주어가 사도 바울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단락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울의 자전적인 모습을 설명한다. 만일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 바울이 이런 고통가운데 있다면 그리스도인 이전의 모든 사람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을 대표적으로 들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내용을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로마서 7장에 대한 해설

사도 바울은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설명하면서 앞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고 (롬 6장), 이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룬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성화의 과정을 설명한다. 성화의 과정에는 고통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과정에서 율법과 육신의 문제에 부딪혀 싸우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먼저 법에서의 자유를 다루고 (롬 7:1-6), 이어서 성화의 과정에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싸움을 자전적으로 진술한다 (롬 7:7-25).

1) 율법에서의 자유 (롬 7:1-6)
사도 바울은 먼저 성화의 과정을 다루기 위하여 율법에서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면서 법의 유효성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선 원칙을 말하고 (1), 이어서 실제적인 예를 제시하고 (2-3), 마지막으로 그것을 적용한다 (4-6).
사도 바울은 먼저 법의 영향을 원칙적인 면에서 정리해준다.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1). 법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우는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 만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진 법을 예로 든다 (2-3). 여기에서 첫째로 문제시하는 것은 기혼녀의 남편과의 관계이다 (2). 기혼녀는 남편생전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인다 (2상). 그러나 남편사후에는 남편에게 매이는 법에서 벗어난다 (2하). 그녀는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다. 둘째로 문제시하는 것은 기혼녀의 다른 남자와의 관계이다 (3). 기혼녀는 남편생전에 다른 남자와의 관계하면 간음하는 것이 된다 (3상). 그러나 남편사후에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이 가능하다 (3하). 그녀는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예증으로 법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와 발휘할 수 없는 경우를 설명한다.

이제 사도 바울은 혼인법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서 (4-6),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법에 대하여) 죽은 경우를 설명한다. 법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4상). 그리스도의 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따라서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 (6). 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 (4하). 첫째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 부활주와의 만남이다. 둘째 새로운 결실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이다. 이 열매는 우리가 죄의 정욕에 충동을 받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던 것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5). 셋째로 새로운 섬김이 가능해진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6).

2) 바울의 자전적 진술 (롬 7:7-25)

이제 사도 바울은 자전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여 율법과 육신에 대한 고통스러운 싸움을 설명함으로써 성화의 과정을 다룬다. 여기에 두 가지 내용이 흐른다. 사도 바울은 첫째 단락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요” (7)라고 말하고, 둘째 단락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안다” (14)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첫째로 율법과 죄의 관계를 다루고 (7-13), 둘째로 율법과 육체의 관계를 다룬다 (14-25).

(1) 율법과 죄 (롬 7:7-13)
사도 바울은 먼저 율법과 죄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전형적인 질문과 대답형식으로 서론과 결론을 장식한다. 서론: “그런즉 우리가 무슨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7). 결론: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3). 율법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율법과 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설명된다.
첫째로 율법은 죄를 알려준다 (7중-8). 사도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설명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게 된다 (7중).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의 성경적인 예를 제시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하). 이것은 십계명가운데 열째 계명이다 (출 20:17; 신 5:21). 율법이 죄를 금하는 계명을 성립하였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죄를 배우게 되었다. 죄는 이렇게 간악하다. 죄는 기회의 명수이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8상). 계명이 죄를 가르쳐주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열째 계명은 탐심을 금하기 위하여 탐심의 종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은 이 계명을 통하여 탐심을 배우게 되었다. 죄가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8중). 따라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 (8하). 율법은 죄를 효과있게 한다.
둘째로 율법은 죄를 살려낸다 (9-12).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9).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율법이 죄와 사람에게 미치는 상이한 영향을 설명한다. 우선 율법과 죄의 관계를 보면 이렇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는다 (8하). 그러나 율법이 있으면 죄가 살아난다 (9하). 또한 율법과 인간의 관계를 보면 이렇다. 율법이 없으면 사람은 산다 (9상). 그러나 율법이 있으면 사람은 죽는다 (9하). 본래 율법의 계명은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0). 왜 그런가? 죄의 간악함 때문이다. 죄는 기회의 명수이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11상). 죄는 생명으로 이끄는 계명을 이용하여 오히려 사망으로 이끈다. 이것이 죄의 사기성이다. “나를 속이고” (11중). 따라서 나를 죽이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이다. 죄는 율법을 통하여 나를 죽였다.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1하). 그렇다면 사망의 책임은 율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게 있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는 이렇게 진술된다.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2).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13). 율법은 선한 것으로서 사망이 되지 않는다. 단지 죄가 선한 율법을 통하여 사망을 이룬다. 이렇게 하여 죄가 율법을 통하여 죄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2) 율법과 육체 (롬 7:14-25)
사도 바울은 이제 율법과 육체의 관계를 다룬다. 먼저 사도 바울을 전제를 말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 (14).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세 가지를 고백한다. 먼저 알지 못하는 것 (15-17)과 아는 것 (18-20)을 말한다. 이 두 부분에서는 병행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서 깨달은 것을 말한다 (21-23).
첫째로 사도 바울에게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15-17). 사도 바울은 먼저 행위의 악함을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15). 우선 사도 바울은 행위를 들어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을 설명한다.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5). 사도 바울은 이로써 시인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율법의 선성이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6). 또한 둘째로 사도 바울은 모순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 행위자가 누구인지 밝힌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7). 죄는 이처럼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사도 바울에게 아는 것이 있다 (18-20). 사도 바울은 이제 육신의 불선을 고백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8). 먼저 사도 바울은 위에서처럼 행위를 들어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을 설명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19). 이어서 사도 바울은 앞에서처럼 모순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 행위자를 고발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
셋째로 사도 바울에게 깨달은 것이 있다 (21-23). 여기에 사도 바울의 세 번째 고백이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21상). 사도 바울은 위의 내용에 근거하여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중성이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하).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속 사람과 관련하여 말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2). 영혼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지체와 관련하여 말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3). 영혼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체는 죄의 법을 사모한다.
사도 바울은 결론에 도달하여 (24-25) 바로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하).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비참함을 선언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성화의 과정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계속하여 죄와 고통스러운 싸움을 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바로 뒤에서 사도 바울은 성화의 절정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말하게 된다 (롬 8장). 이것을 내다보면서 사도 바울은 앞당겨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25상).

성화의 과정은 율법에서 자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싸움을 동반한다. 죄는 율법을 통하여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을 장악하려고 하며, 육체를 통하여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을 실패로 인도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화는 싸움이다. 성화는 꽃밭에서 유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고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힘으로 성화를 위한 싸움을 지속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화를 성취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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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C.H.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Moffatt NTC), London 1932
A.Nygren, Commentary on Romans, London 1958
J.W.MacGorman, “Romans 7. Once more”,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19 (1976)
H.Vorlaender, anthropoj (Mensch), Theologisches Begriffslexikon zum Neuen Testament
K.Kertelge, “Exegetische berlegungen zum Verstaendnis der paulinischen Anthropologie nach Roemer 7”, ZNW 62 (1971)
W.G.Kuemmel, Roemer 7 und die Bekehrung des Paulus, Leipzig 1929 = ND in: Roemer 7 und das Bild des Menschen im Neuen Testament. Zwei Studien (ThB 53), Muenchen 1974
R.Schnackenburg, “Roemer 7 im Zusammenhang des Roemerbriefes”, in: Jesus und Paulus, FS W.G.K mmel (Hg. E.E.Ellis/E.Gr er), Goettingen 1975
조병수, “사도 바울의 인간이해”, 신약신학 열두 논문,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수원) 1999, 161-176